▲ 2024년 11월 30일 <마이니치 신문>에 실린 기사, '힘들다면 목소리를 내세요 – 섭식장애에 대한 이해를 목표로 한 소책자, 교육 현장에서 호평(つらければ声を上げて 摂食障害の理解目指す冊子、教育現場で好評)'에 실린 사진. 출처: https://mainichi.jp/articles/20241129/k00/00m/040/291000c
스즈키 코코로의 인터뷰 답변을 메일로 받은 것은 지난 2월 21일, 세 번째 섭식장애 인식주간이 시작되기 며칠 전이었습니다. 답변을 읽고 저는 분노와 공감과 수많은 복잡한 감정이 들어, 이 인터뷰를 27일 '일본 세션'에 앞서 블로그에 발행하면 어떻겠느냐고 코코로에게 물었죠.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되면 정작 세션 때 관객들의 질문이 모두 인터뷰에 언급된 그 사건에 대해서만 집중될 것 같아, 세션이 끝난 뒤에 공개되면 좋겠다고 그는 답했습니다. 코코로와 그가 창립한 사단법인 에히메현 섭식장애 지원센터(一般社団法人愛媛県摂食障害支援機構)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시다면, 지난 2월 27일 서울대에서 있었던 섭식장애 인식주간(EDAW2025) '일본 세션' 라이브스트리밍 영상을 먼저 시청하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박지니: 당신은 1990년대 초반에 처음으로 섭식장애 증상을 경험하셨고, 당시만 해도 일본에는 섭식장애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1980년대부터 섭식장애 발병률이 급격히 증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한국의 초기 섭식장애 전문의 중 한 명도 1990년대 초반에 일본에서 연수를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의 섭식장애 관련 상황과 분위기, 그리고 본인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스즈키 코코로: 1980년대에 환자가 급증했다는 정보는, 아마도 당시 일본에서 최첨단 연구와 지식을 보유한 사람들이 보고한 내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에히메현은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시코쿠라는 섬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도쿄와 같은 대도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정보는 저희에게 거의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시코쿠에도 섭식장애와 비슷한 증상을 가진 사람들이 몇몇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가 살던 지역에서는, 병원에 가더라도 모든 환자가 적절한 대응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부적절한 대응이 더 많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섭식장애"라는 표현이 사용되지 않았고, 저에 대한 진단 역시 단순히 "신경성 식욕부진증"이었습니다. 저는 스무 살 무렵(1997년경) NABA(일본 거식증·폭식증 협회) 관련 자조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 모임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직접 셀프헬프 그룹을 운영한 적도 있습니다. 그 당시 시코쿠에서도 몇몇 당사자들이 모여 각자 자신이 받고 있는 치료, 복용 중인 약, 향정신병제를 처방받고 있다는 이야기, 병원 치료에 의존했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경험 등을 공유했습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참여했습니다. 당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원 치료에 의지하는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증상을 조절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셀프헬프 그룹은 결국 잘 운영되지 못하고 해산되었습니다.) 지방에서는 섭식장애에 대한 정보와 의료 서비스가 여전히 뒤처져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지방일수록, 그러한 정보에 대한 갈망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치료해 준 의사도 당시 여러 권의 책을 직접 주문해서 읽었다고 합니다. 또 저희 부모님도 도시에 사는 친척에게 부탁해 책을 보내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지방에서는 의사도 가족도 정보를 얻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처음 섭식장애를 겪던 시절과 비교하면, 지방에서도 섭식장애를 진료하는 병원이 조금씩 늘어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환자가 만족할 만한 치료를 받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대도시에서 연구되는 정보의 양과 질이 향상됨에 따라, 지방에서도 섭식장애에 대한 정보와 치료의 수준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도 시코쿠에서는 본질적으로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2015년경에도, 시코쿠에는 제대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이 없어 도쿄까지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치료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2010년대에 들어서는, 숙박형 세미나에 참가하거나 단식 수련원에 다니는 등,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인터넷의 보급이 이러한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기에는 수상쩍은 사이트에 속아 거액을 송금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현재는 섭식장애를 앓는 사람이 과거보다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하고 방치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섭식장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의료진과 지역 사회 구성원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방에서는 오히려 이런 개인들의 노력 덕분에 섭식장애 환자들이 도움을 받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릅니다. 현재 섭식장애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이해심 있는 개인들의 선의에 의존하는 사회 구조는 결국 이러한 헌신적인 개인들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고 있으며, 지속 가능성이 낮고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박지니: 저는 당시 당신의 치료를 맡았던 여성 의사의 존재가 정말 큰 행운이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또 그분의 치료 방법에도 공감하고요. 그분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은데요. 예를 들어, 어떤 경위로 그 의사와 만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분이 어떻게 내과 병동에서의 입원 치료를 조율하고 비-정신과 부서와 긴밀하게 협력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매우 궁금합니다. 스즈키 코코로: 저의 주치의는 부모님이 우연히 데려간 종합병원의 내과 의사였습니다. 당시 저는 어머니에게 생리가 없다는 사실을 전했지만, 부모님 입장에서는 고등학생인 저를 갑자기 산부인과로 데려가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고, 그래서 내과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열여섯 살이었지만 키도 작고 초등학생 같은 체형이었습니다. 또 사람에 대한 불신이 심해 거의 말을 하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에, 병원 직원분이 저를 배려해 “여자 의사 선생님이 더 좋겠지?”라고 말씀하셨고, 여러 명의 내과 의사 중 그 여성 의사 선생님이 저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만남은 우연이었습니다. 우연히 저를 맡아주신 여성 의사 선생님은 당시 37세로, 아직 젊은 의사였기 때문에 더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를 위해 공부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덕분에 당시에는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섭식장애'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그날 바로 저에게 '신경성 식욕부진증'이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저는 영양실조로 야윈 상태이기도 했지만, 당시 더 심각했던 문제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지 않는 것은 타인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고,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 여성 의사 선생님은 이를 그냥 넘기지 않고, “정신과에는 일주일에 한 번 이야기하러 가자”라는 약속만 하고, 저를 내과 병동에 입원시켜 주셨습니다. 또 내과 병동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지내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하셔서 개인 병실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병이 체중 증가에 대한 두려움을 동반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인지, 영양 보충을 위한 비타민과 소량의 칼로리만 포함된 링거만 맞도록 해주셨고, 탈수를 방지하는 데 집중하셨습니다. 강제로 고칼로리 링거를 맞게 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다만, “이대로 체중이 더 줄어들면 링거 맞을 거야!”라고 경고하시긴 했지만요. (웃음) 또한, 일주일에 한 번 정신과에 방문할 때도, 제가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래 놀이 치료를 하거나 정신과 선생님과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치료가 진행되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병원의 정신과 병동에는 성인 환자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정신과에서도 당시 제 상태를 고려하면 자체적으로 적절한 치료를 제공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여성 의사 선생님은 학교 선생님들께도 연락을 취해 주셨습니다.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담임 선생님과 보건 체육 선생님이 학생들을 매우 배려하는 분들이었고, 이 또한 행운이었는데, 학교와 병원이 협력해 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과 개인 병실에 입원해 있던 동안, 여성 의사 선생님은 매일 오후 회진 때 한 시간씩 시간을 내어 저와 이야기를 나눠 주시곤 했습니다. 대화 내용은 전부 선생님의 일상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가족 이야기, 선생님의 아버지는 뚱뚱해서 배가 튀어나와서 혼자 힘으론 양말을 신지 못해서 매일 아침 어머니가 신겨 주신다든지, 선생님은 케이크를 좋아하는데 먹으면 여드름이 난다든지, 그런 이야기뿐이었습니다. 그 대화 중에 단 한 번도 “먹어야 한다” 또는 “안 먹으면 안 된다”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당시 매우 적절하고 정확한 의료(치료)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제 주치의 선생님이 해주신 그 모든 관계 형성을 '의료'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섭식장애 회복에 필요한 모든 관계적 지원을 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관계적 지원을 오늘날의 병원에서 모든 환자에게 제공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당시는 의료가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다양한 방법을 고민해 주셨고, 그 친절함이 결국 환자였던 제게 그런 관계적 지원을 제공해 주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는 저는, 앞으로 섭식장애의 이론 연구가 발전하고 의료 기술만 발전할 경우 도리어 중요한 것들이 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섭식장애 치료가 지나치게 형식화되고 매뉴얼화되면, 오히려 구제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의료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있습니다. 신체가 쇠약해지거나, 멈추려는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것은 결국 의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섭식장애 회복을 위해서는, 물리적인 측면에서 “(멈추려는 심장을 뛰게 하는 등의) 생명을 구하는 것”과 정신적인 측면에서 “(삶에 기쁨을 주며) 마음을 구하는 것”은 둘 다 동시에 필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박지니: 저는 당신이 도움을 받았다고 했던 스무 살 손위의 여성 멘토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그녀는 어떤 분이었고,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런 기회는 흔히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누군가의 소개나 인맥을 통해 만나게 되신 걸까요? 스즈키 코코로: 제가 스물 서너 살 무렵, 증상이 심해서 일을 하지 않고 있던 시기에, 지역 신문의 독자 기고란에 섭식장애에 대한 이야기나 제가 평소에 생각하는 것들을 한 달에 한 번 정도 글로 써서 보내곤 했습니다. 그 글을 읽은 신문의 한 독자가 신문사에 문의를 했고, 그것을 계기로 그분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저의 멘토가 된 여성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일본여성회의'라는, 여성 인권과 사회 진출을 다루는 행사에서 스태프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제게 직접 연락을 주신 덕분에, 저도 그곳 행사에서 제 메시지를 발표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또 그분과 여성회의 활동을 도우면서 다른 사람들이 겪는 삶의 어려움과 제 자신의 어려움 사이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분과 그분의 주변 사람들이 준 영향 덕분에 저 역시 인간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을 만나고 나서, 저는 "섭식장애는 나 혼자만 겪는 개별적이고 특별한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어려움들이 복잡하게 얽혀 쌓이면서 발생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저는 제 섭식장애가 100% 제 잘못이라고 믿었고, 매일 스스로를 비난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요인이 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제 생각이 바뀌었고, 그것이 저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사회에서 섭식장애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접근해 보니, 점점 흥미로운 주제로 느껴졌습니다. 증상 자체는 여전히 있었지만, 섭식장애를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는 것만으로도 삶의 방식이 상당히 달라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러한 변화가 흥미롭게 느껴지자, 점차 증상도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저는 이런 방식으로 회복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 후, 다른 섭식장애 경험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섭식장애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나니 한결 편해졌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저는 "섭식장애는 단순히 병원에 가기만 하면 나을 수 있는 그런 병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확고히 가지게 되었습니다. 박지니: 당신은 그 두 분의 여성 외에도 일본 각지의 자조 모임을 통해 동료 및 선배들과 연결될 수 있었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알기로, 최초의 섭식장애 동료지원 커뮤니티는 1987년에 설립된 NABA인데요. 당신이 참여했던 자조 모임도 NABA와 연관되어 있었는지, 혹은 또 다른 어떤 단체와 인연을 맺었으며 그곳에서 어떤 경험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스즈키 코코로: 네. 저는 스무살 무렵 처음으로 NABA 모임에 참가했습니다. NABA는 일본 각지에 지부를 두고 운영되었기 때문에, 본부가 있는 도쿄까지 가지 않더라도 제가 살고 있던 시코쿠에서 열리는 모임에 쉽게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조 모임'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더라도 의료진으로부터 이러한 정보를 얻을 기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저는 운 좋게도 자조 모임의 존재를 알고 있던 분 — 제가 다녔던 전문학교의 담임 선생님이 섭식장애를 앓고 있는 딸을 둔 어머니셨거든요 — 을 통해 이 모임을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자조 모임 방식이 자신의 삶의 방식과 맞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맞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병원에서 섭식장애를 경험해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받기보다는,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제 스스로 증상과 삶의 어려움을 마주할 수 있는 환경이 더 편안하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20년 전에 시작한 자조 모임은 NABA의 방식을 참고한 것이었습니다. 자조 모임 내에서 나누는 대화 중 특히 흥미로웠던 점은, 다들 섭식장애를 "열심히 고치려는" 것이 아닌데도 (오히려 고치려고 애쓰지 않기 때문에)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지는 요소가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늘 스스로를 미숙하고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조 모임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 주는 순간이 있었고, 나 자신조차도 그런 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이 너무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자조 모임이 가진 이러한 힘에 매력을 느껴 일본 전국의 자조 모임에 참여하면서 여러 곳을 다녀보는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스스로를 "자조 모임 오타쿠"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도쿄에 있는 NABA 본부에도 방문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앞서 이야기한 멘토와의 관계도 더욱 깊어졌고, 제 증상도 점차 나아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정규직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실 사회에서의 직장 생활은 냉정했고, 직장 내 인간관계는 저에게 매우 힘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직장 생활과 자조 모임 참석을 병행했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 균형 덕분에 저는 일을 계속할 수 있었고, 제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박지니: 에히메현 섭식장애 지원기구를 20년 동안 운영해 오셨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섭식장애로 고통받는 분들과 함께 그룹 활동을 지속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거라 짐작합니다. 최근 정신건강 동료지원단체에서는 스태프가 5년 이상 근무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얘기를 누군가로부터 들었는데요. 이는 조직 내 인간관계나 업무 방식이 효과적으로 기능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과제를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지속할 수 있었던 비결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스즈키 코코로: 저희 에히메현 섭식장애 지원기구의 전신은 '리본의 모임(リボンの会)'이라는 자조 그룹이었습니다. 자조 그룹은 오직 당사자들만으로 운영되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당사자들만으로 그룹을 지속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운영과 관련된 여러 문제를 모인 당사자들이 함께 부담하고 해결해 나가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웠습니다. 결국 매달 모임에 참석하는 한두 명이 모든 책임을 지고 그룹을 유지해 나가는 형태가 되기 쉬웠습니다. 제가 자조 그룹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상담사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사자들만으로 운영하는 그룹은 5년도 지속되지 않아. 특히 섭식장애 그룹은 다른 중독 회복 그룹보다 더 지속되기 어렵지. 1년만 지속해도 잘한 거야." 그 말을 듣고 "그런가 보구나…"하고 받아들였고, 오히려 담담하게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사라질지도 모르는 모임, 다음에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는 동료들이기에 더 애틋한 마음이 들었고, 오히려 그 '취약한' 환경 자체를 소중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제게도, 그리고 모두에게도 소중한 공간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만든 자조 그룹이 없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자조 그룹의 역사와 형성 과정, 그리고 집단역학(group dynamics)을 공부하며 때로는 이론을 활용해가며 활동을 지속해 왔습니다. 현재 운영하고 있는 에히메현 섭식장애 지원기구는 단순히 자조 그룹을 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 복귀를 돕는 직업 훈련 시설 운영, 섭식장애에 대한 인식을 확산하는 '마젠타 리본 운동'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자조 그룹 모임은 여전히 당사자들만 운영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기타 사업은 “시민 응원단”이라는 지원자 그룹을 조직해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직업 훈련 시설에서는 복지 전문가를 고용하고 있습니다. 시민 응원단에는 다양한 기술과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협력하고 있으며, 그들의 지원을 적극 활용해 단체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정리하자면, "동료지원 단체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핵심이 되는 한두 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 한두 명을 지원할 외부 협력자를 모으는 것"이 지속 가능한 운영의 핵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박지니: 섭식장애를 겪는 사람들이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직업 훈련 시설을 설립하셨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시설에 대해, 그리고 어떤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스즈키 코코로: 저희는 국가 제도에 기반한,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직업 훈련 시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제도에서는 지적 장애인, 신체 장애인, 정신 장애인, 그리고 난치병 환자가 지원 대상이며, 섭식장애는 이 중 정신장애에 해당합니다. 국가 지원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시설이기 때문에, '이용자 한 명이 하루 동안 시설을 이용할 때마다 일정 금액이 지급되는' 방식으로 정부의 보조금을 받는 구조입니다. 해당 질환의 종류는 다르지만, 전국적으로 이와 같은 직업 훈련 시설은 1만 5천여 곳이 운영 중입니다. 하지만 섭식장애를 겪는 사람들만으로는 시설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까닭은, 많은 사람들이 하루 대부분을 폭식과 구토에 시달리며 보내거나, 거식증으로 인해 활동이 어려워 시설에 올 체력과 시간을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회복을 목표로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저희 시설을 찾고 있습니다. 때문에 저희는 학교 부적응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나 경미한 발달 장애를 가진 사람들 등, 다른 정신 건강 문제를 겪는 이들도 함께 받고 있습니다. 저희는 지역 사회와 기업으로부터 다양한 업무를 의뢰받아, 개별적으로 또는 역할을 나누어 작업을 진행합니다. 학교나 직장과 마찬가지로 하루 일과가 정해져 있으며, 시설을 이용하는 동안만큼은 자신의 장애나 증상을 잠시 잊고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집중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또 단순히 작업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경우 상담 제공, 자습 공간 지원, 자격증 취득 지원, 가정에서 안전한 공간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주간 보호 공간 제공 등의 기능도 갖추고 있습니다. 시설의 스태프들은 단순한 직원이 아니라, 이용자들의 동료이자, 상담 상대이자, 협력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러한 환경을 마련하게 된 건, 제가 과거 섭식장애 증상에 휘둘리던 시기의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제 목표는, 과거의 저처럼 증상에 휘둘리는 사람이 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일을 하지 못하고 하루 종일 집에만 갇혀 있던 시절, 지적 능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신체적으로도 손과 발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기존의 직업 훈련 시설에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외부에서 저를 보는 사람들에겐 저는 아무런 어려움이나 장애가 없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제가 갈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 배울 수 있는 공간조차 없다는 것이 가장 힘든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회적 삶이 곤란해진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안심하고 머물 수 있는 공간이면서도, 나도 사회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곳,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일은 아직 자신이 없어도 괜찮은 곳. 겉보기에는 단순한 '이기적인 바람'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당시의 내게는 꼭 필요했던 공간." 바로 이것이 저희 직업 훈련 시설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 스즈키 코코로의 발표 영상 중 이 부분에서, 저는 당혹스럽기도 하고 또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역시 일본보다 전혀 나은 점이 없는 상황인데 말이지요.
박지니: 지난해 섭식장애에 관한 소책자를 제작해 전국의 고등학교와 보건센터에 배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정부나 기타 외부 기관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은 프로젝트였나요? 또 내용을 작성할 때 전문가의 자문을 받거나 교정을 의뢰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소책자를 전국적으로 배포할 때 물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는지, 수령한 기관들의 반응은 어땠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주세요. 스즈키 코코로: 이 프로젝트의 자금은 독립행정법인 복지의료기구(独立行政法人福祉医療機構)로부터 지원받았습니다. (이 기관은 일본 후생노동성 및 아동가족청의 관할 하에 운영되는 독립행정법인입니다.)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전국에서 다양한 기획안이 제출됐는데, 경쟁 선발 과정을 거쳐 저희 프로젝트가 채택되었습니다. 소책자의 초안은 제가 직접 작성했습니다. 본문 작성과 교정 작업은 저희 단체의 다른 멤버들이 맡았으며, 여기에는 전문 편집자 및 공문서 작성 전문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또 가장 중요한 점은, 섭식장애를 경험한 당사자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는 점입니다. 소책자의 포장 및 배송 작업은 저희가 운영하는 직업 훈련 시설 이용자들이 도와주었습니다. 또 일본 우체국과 계약해, 전국 각지로 배송하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소책자를 보내기 전 별도의 사전 연락 없이, 곧바로 학교와 관련 기관에 발송했는데요. 그럼에도, 수령한 기관들의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었으며, 단 한 건의 불만도 접수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해당 기관들이 저희가 제공한 정보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덕분에 배포 과정은 예상보다 훨씬 원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박지니: 당신이 말씀하신, "모든 의료진이 섭식장애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족스러운 치료를 제공해 줄 의사를 찾는 것은 운에 달려 있다고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섭식장애는 매우 다양하며, 100명의 환자가 있다면 100가지의 회복 경로가 존재합니다. 따라서, 의료에만 의존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섭식장애는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필요할 때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 현실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과제일지도 모릅니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한국에서도 같은 문제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스즈키 코코로: 저는 섭식장애가 사회적 요인이 배경에 있는 질병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의료에서 다루는 바이러스, 병원균, 혹은 신체 장기의 이상으로 인해 발생하는 질병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따라서, 섭식장애로부터의 회복과 관련해 의료만으로는 해결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질병이 심각해진 경우, 예를 들어 영양 결핍으로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혹은 구토를 지나치게 반복해 전해질 불균형이 생기고 심장이 멈출 수도 있는 위급한 상태에 처했을 때, 이런 경우에는 반드시 의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증상이 있어도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경우, 설령 의료기관을 방문한다고 해도 의료진으로부터 아무런 조언도 받지 못하고, 증상이 나아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제가 운영했던 자조 모임의 동료들로부터 수없이 들어온 이야기입니다. 병원이란 곳은 신체적인 '수치'가 악화되었을 때 과학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하지만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능숙하지 않은 기관이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섭식장애의 회복 과정에서 의료가 할 수 있는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재 일본에서는 여전히 많은 의료 관계자들이 이 불편한 진실을 인식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몇 년 전, "섭식장애는 의료로만 치료할 수 있다"라고 단언하는 의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를 들으며, "과연 일본은 이대로 괜찮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섭식장애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이 본인이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회복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방법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의 가치관에 맞춘 회복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환자의 주변에 섭식장애에 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꼭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돕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또 의료 분야 외의 접근 방식이 회복에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많은 대학병원들이 신체적인 치료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환자가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응급 상황이 발생하면 구급차로 이송하여 생명을 구하고, '적절한 체중'으로 회복시키는 것까지만 진행합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지원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때문에, 저희 단체로도 이에 대한 불만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한 정신과 의사가 제게 말하길, "병원에 이송되는 환자가 너무 많아, 병상 수가 부족해서 정신적인 지원까지 할 여력이 없다"고 하더군요. 대학병원에서 충분한 케어를 받지 못한 환자들이 심리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 작은 개인 병원을 찾아가더라도, 많은 경우 의사들이 섭식장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환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문제는 일본 정부가 섭식장애에 대한 예산을 적극적으로 편성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른 질환과 비교했을 때, 섭식장애 치료에 대한 의료 수가가 낮다 보니, 의사들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박지니: "의사 중심의 계급 구조"에 대한 논의는 한국에서도 매우 공감할 수 있는 주제입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섭식장애 치료 가이드라인(2012년 발행), 전국 지원 센터(2014년 설립), 그리고 섭식장애 대상 CBT의 건강보험 적용(2018년 시작) 등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또 일본섭식장애학회와 일본섭식장애협회와 같은 전문가 조직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과 조직이 일본의 섭식장애 지원에 미친 영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스즈키 코코로: 저희 에히메현 섭식장애 지원기구는 5년 전인 2020년 집권여당에 정책 제안을 할 기회를 얻었지만, 이를 '전문가' 조직이라고 불리는 의사 단체, 즉 일본섭식장애협회에 빼앗긴 경험이 있습니다. 참고로, 저는 일본섭식장애학회의 회원입니다. (과거 학회에서 발표할 기회가 있어 가입했습니다.) 많은 학회 회원들이 일본섭식장애협회의 회원이기도 하며, 그 당시 상황을 알고 있는 의사들도 많지만 아무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때의 일을 기록한 책을 2025년 봄에 출판할 예정입니다. 현재 저는 직접 의사 중심의 계급 구조로 인해 고통받고 있으며, 당사자 및 당사자 단체가 억압당하는 문화가 이대로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 단체에는 다양한 문제 제기가 접수되고 있습니다. 가령, 정부가 예산을 편성해 전국적으로 설립한 지원 거점 병원에는 '피어 서포터(Peer Supporter)'라는 제도가 도입되었습니다. 이름만 보면 좋은 취지의 정책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피어 서포터가 의사의 지시를 따르는 보조 인력처럼 취급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이 시스템을 마냥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물론, 모든 지원 거점 병원이 이러한 방식으로 운영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 이런 환경에서도 원활하게 운영되는 사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직접 피어 서포터로 활동하고 있는 분들로부터 불만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섭식장애를 의료 분야에서만 다뤄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른바 '전문가' 조직이 의료의 틀을 벗어나 더 넓은 시야에서 접근하지 않는 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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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한국 섭식장애 인식주간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잠수함토끼콜렉티브입니다. Instagram@rabbitsubmarinecol ArchivesCategories |